영화 정보
제목: 미저리 (Misery)
개봉: 1990년
감독: 롭 라이너
장르: 공포, 스릴러
주연: 캐시 베이츠, 제임스 칸
구원자인가 사육자인가, 눈보라 속에 갇힌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는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을 팬심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선을 넘어 상대방을 소유하려 들 때,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폭력이 됩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미저리>는 삐뚤어진 팬심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스릴러 영화의 바이블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살인마가 칼을 들고 쫓아오고 피가 낭자한 일반적인 공포 영화와 다릅니다. 다리가 부러져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는 남자와,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는(것처럼 보이는) 여자. 이 정적인 공간에서 흐르는 숨 막히는 긴장감은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관객의 심장을 조여옵니다. 오늘은 집착과 광기, 그리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봅니다.
줄거리: 당신의 소설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요
유명 소설가 폴 셸던(제임스 칸)은 자신의 인기 시리즈인 미저리를 끝내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산속 별장에 머물다 돌아오던 중, 폭설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의식을 잃은 그를 구해준 것은 전직 간호사이자 그의 광팬인 애니 윌크스(캐시 베이츠)였습니다.
그녀는 폴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 주며 극진히 보살핍니다. 처음엔 생명의 은인인 줄 알았던 그녀. 하지만 폴이 쓴 신작 원고를 읽고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태워 버리라고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소설 속 주인공 미저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본색을 드러냅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눈 덮인 산장, 걷지 못하는 작가, 그리고 친절한 미소 뒤에 광기를 숨긴 간호사. 폴은 살아서 이 집을 나가기 위해 그녀를 위한 소설을 다시 써야만 합니다.
분석 1. "내가 당신의 1호 팬이에요", 스토킹 심리의 교과서
애니 윌크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악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I'm your number one fan(내가 당신의 1호 팬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이 대사는 처음엔 칭찬처럼 들리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끔찍한 소유욕의 선언으로 바뀝니다.
그녀의 심리는 전형적인 경계성 인격 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와 스토킹 성향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폴을 신처럼 숭배하다가도, 수틀리면 짐승처럼 학대하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녀에게 폴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의 망상을 충족시켜 줘야 하는 인형일 뿐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사생팬이나 스토커들의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내 뜻대로 통제하고 싶어 하는 비뚤어진 욕망이 투영된 것입니다.
분석 2. 침대라는 감옥, 그리고 충격적인 발목 타격 씬
이 영화의 백미이자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은 바로 발목 타격(Hobbling) 씬입니다. 폴이 몰래 방을 탈출하려던 시도가 발각되자, 애니는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해주겠다"며 거대한 쇠망치로 폴의 멀쩡한 발목마저 부러뜨립니다.
이 장면이 끔찍한 이유는 잔인한 묘사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녀가 이 짓을 저지르면서도 "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표정 때문입니다. 이로써 폴은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제압당하고, 침대라는 작은 공간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이는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무력감(Helplessness)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장치이며, 도움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통제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줍니다.
분석 3. 창작의 고통 vs 독자의 강요
심층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작가(창작자)와 독자(대중)의 권력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합니다. 폴은 대중 소설이 아닌 진지한 문학을 쓰고 싶어 했지만, 애니(대중)는 그가 평생 미저리(로맨스 소설)만 쓰기를 강요합니다.
애니가 휠체어에 앉은 폴에게 타자기를 가져다주며 "새로 써! 내가 원하는 대로!"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대중의 입맛에 맞춰 영혼 없는 글을 써야 하는 작가들의 비애를 공포 버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폴이 결국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과정은 단순한 생존 투쟁을 넘어,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타인의 욕망에 복종해야 하는 정신적 고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폴이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애니를 공격하는 무기로 타자기를 내리치는 장면은, 작가로서의 주체성을 되찾는 통쾌한 복수가 됩니다.
총평: 캐시 베이츠가 완성한 우아한 광기
애니 역을 맡은 캐시 베이츠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소녀처럼 수줍게 웃다가 1초 만에 악귀처럼 돌변하는 연기로 관객을 쥐락펴락합니다.
나의 육체를 감금 당한 채 나의 의지는 전혀 존중되지 않는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을 따라 간다면 남성이 여성을 감금하고 집착하려는 모습이 더 일반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약한 존재인 여자가 남성을 감금하고 통제하는 모습에서 그 공포감이 더 극에 달하게 합니다.
<미저리>는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없이, 오직 사람과 고립된 상황만으로 극한의 공포를 만들어낸 수작입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내 곁에만 가두고 싶다는 생각, 그 비뚤어진 집착이 상대방에게는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준 영화는 없을 것입니다. 겨울밤, 방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서 본다면 그 서늘함이 배가 될 것입니다.